2017. 12 길 위의 자유인

글_채민정

 

 

 

불타오르는 청춘의 사명감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그때 나는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도 보급되기 전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영등포 기차역에서 ‘내일로’ 티켓을 구입했다. 매표원에게 기차 시간표도 얻었다. 어딜 가야겠다는 계획도 없었다. 떠나기만 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았다. 혼자서도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건 뭔가 독립적이고 용기 있는 – 그래서 내가 아닌 – 어른의 모습이었다. 흰 눈이 소복소복 쌓인 설악산의 12월은 몹시도 추웠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나였다. 변하는 건 없었다.

일 년이 지나고 대4병에 걸린 나는 자아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지며, 지난 여행에서 ‘왜 나를 찾지 못했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다. 아. 국내여행이라 별로 어려움이 없었던 게야.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 가면, 자아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홀로 떠났던 2주간의 유럽 여행의 결론도 별 다르지 않았다.

그게 벌써 6년 전의 일인데, 나는 아직도 자아를 찾아 헤매고 또 여행을 떠난다.

 

 

 

 

 

(이런 말을 하기엔 나도 아직 한참 젊고 어리지만) 삶의 많은 것들이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고, 때가 되어야 말할 수 있는 거더라. 6년 전에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며, 그때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왜 자아를 찾을 수 없었는지, 살며시 알 것 같다면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걸까.

여행을 가려고 마음먹었던 것, 엄마에게는 친구들과 간다고 거짓말했던 것, 그리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 티켓을 끊었던 것.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길을 걷고. 혼자 감당해야 하는 순간의 결정들과 혼자 물리쳐야 했던 두려움도. 집으로 돌아오면서 느꼈던 작은 안도감과 마음 깊숙한 곳에서 피어났던 자유함도. 그 작은 조약돌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한순간도 무용한 것은 없었구나 싶다.

이제 나는, 어떻게 가는지는 몰라도 어디를 가야하는지 정도는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빗대곤 한다. 어느 세계에선가 살다가 초록빛 작고 아름다운 지구별에 잠시 놀러왔다고 표현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돌아갈 아버지의 집을 꿈꾸며 이곳에서 100년의 짧은 생을 채 살지도 못한다.

나의 몇 번의 짧은 여행이 그러했듯, 나의 삶은 크고 작은 선택과 실패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10년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혼자서 걸어야 하고, 때로는 누구와 함께 있다가 헤어질 수도 있겠지. 그런 삶 속에서 나는 나를 알아가고 자유함을 터득하고 사랑을 누리고, 그렇게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버지의 보내신 뜻을 알았다고,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그렇게 삶을 여행하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벌써, 라는 말이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12월이다. 나이가 인생시간의 속도라고 한다. 나는 10년 전보다 시속 10km나 더 빠른 속도로 2017년을 살아냈다는 말인데.. 요즘은 그도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니, 이제는 옛말도 꽤 인정하게 된다. 좀 더 나이가 들면 조카에게 ‘어른들 말씀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라고 훈계를 늘어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짐을 꾸리고 다시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항상 멈춰있는 것만 같다. 여전히 해와 달은 뜨거나 지고 여행지에서의 사람들의 일상은 흘러가기 마련이지만, 나는 시공간을 초월한 자유인으로 그 땅에 있는 기분이 들곤 한다. 매일 특별한 것을 만나고, 새로운 음식을 먹고,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래서 나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어린아이도 되고, 많은 것을 배운 어른도 된다. 나는 나이를 먹지도, 주름이 들지도, 꼰대가 되지도 않는다.

‘벌써’ 찾아온 12월이 매정하게만 느껴진다면, 이제 길을 나서보자. 반짝반짝 모래알이 아름다운 해변이 아니라도, 멋들어진 유럽의 고성과 잘 가꿔진 정원이 아니라도. 우리가 가는 모든 길 위에,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기다린다.

 

2017-12-09T00:19:1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