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생각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글_신인철

 

part 5. 기독교인의 올바른 비전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꿈이나 어떤 목표를 이야기할 때 ‘비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비전의 정의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확실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꿈’이나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해야 하는 직업 혹은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전을 꿈이나 직업으로만 생각한다면 메인에 최상급 안심스테이크가 준비되어 있는데, 애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배불리 먹고 만족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왜 비전을 직업이랑 연관시켜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두루뭉술한 구름처럼 머릿속을 떠다니는 비전을 구체화해야 할 때가 있다. 이때 그 사람의 가치관이 무엇이냐에 따라 비전의 모양이 다듬어지게 되는데, 기독교인은 교회에서 받았던 교육들이 비전의 모양을 다듬는 척도가 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과 다른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중심으로 비전에 대해 생각해 보고 교육하여야 하는데, 교회도 사회와 마찬가지로 비전을 직업과 연관시켜 교육하는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 ‘큰 영향력’을 곁들이며 강조한다.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세요.’

나는 설교 시간에 이런 의미를 가진 말을 많이 들었다. 내 생각이 작았을 땐 이런 말은 좋은 말이고, 설교자의 설교처럼 큰 영향력을 가지길 소망했었다. 그래서 나는 ‘비전 = 성공한 직업이나 명성 = 큰 영향력’이라는 공식으로 고착화된 생각을 가지고 살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때까지 옳다고 생각하던 기독교적인 가치관들에 대해 ‘뭔가 이상하다’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올바른 가치관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고, 생각이 어느 정도 커지니 저런 부류의 말과 생각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게 되었다.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영향력이라는 포장지로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하는 ‘큰 영향력을 가져라’라는 말에는 최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세상적인 가치관으로)성공하라’는 것과 ‘보이는 크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 사회에서 성공해야 되고, 남에게 자랑할 만 한 것이 많아야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논리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성공하기 위해 하나님께 성공을 구해도 된다는 말을 설교시간에 성도에게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들이 많은(큰) 일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큰 영향력을 위해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살다 보니 큰 영향력이 생긴 것이다. 예수님의 설교시간에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왔고, 요셉은 애굽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이 번성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으며, 사무엘은 미스바에서 온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회개 기도를 하게 하였다. 이 외에도 성경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이 큰 영향력 가지고 있었다. 이런 성경 속 인물들을 근거로 설교에서 ‘큰 영향력을 가져라’고 말씀하시는 것일 텐데,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성경 속 인물들은 큰 영향력을 갖기 위해 노력하며 살지 않았다. 하나님이 지정(선택) 하셨거나, 하나님을 위해 기독교적인 가치관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하심 아래 이스라엘 민족의 발판을 닦은 위대한 인물이다. 꿈에서 형들의 곡식 단이 자신의 곡식 단을 둘러서서 절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한 것(창 37: 7-9)을 꿈꾸게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요셉을 위하여 위대한 비전을 세우신 것은 확실한 팩트다. 그래서 많은 설교에서는 요셉이 꾼 꿈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런데 꿈만 조명하는 것이 문제다.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는 요셉의 마음이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됐을 때에 요셉의 마음은 생각해 보지 않고, 요셉의 성공만 이야기하는 설교, 요셉처럼 꿈꾸면 여러분도 성공할 수 있다는 설교 등등. 고난을 참으면 총리가 될 수 있다는 감언이설만 이야기한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요셉이 꿈꾸고 싶어서 꿈을 꿨는가?’라는 질문을 해봐야 한다.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을 형들은 곱게 보고 있지 않았는데, 요셉이 꾼 두 번의 꿈으로 인하여 형들은 요셉을 시기(창 37:11)하게 된다. 그리고 꿈 때문에 애굽으로 팔려가고, 노예생활을 하고, 감옥생활도 했다. 그런 생활 중에 과연 요셉은 자신이 꿨던 꿈을 붙잡고 살고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 39:21-23)

 

요셉이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지는 보디발의 아내에 유혹을 이겨내는 장면(창 39:10)과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장면(창 41:16, 25)에서 알 수 있다. 특히 41장 25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이라는 문장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요셉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창 41:25)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을 위해 노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바라봤다. 결국 요셉은 자신의 힘이나 스킬로 좋은 성공 코스를 쫓아 총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심 아래 요셉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전을 어떤 자세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인의 올바른 비전은, 하나님의 비전이라는 큰 틀 안에 나의 비전이 작은 틀로 꾸며진 모양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내 목표를 위해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성실히 수행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비전을 바라보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하고 쉬운 것 같지만 상당히 어렵고, 힘든 싸움이다. 돈을 많이 벌고 싶고, 명예도 얻고 싶고, 큰 영향력을 가져 권력도 휘두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그런 본성을 매일 다 갈아엎으며 일종의 성화를 해야 하는 것이니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사울처럼 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

나는 기독교의 기본적 행동 강령은 ‘낮은 곳을 향하여’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 또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있는가도 생각해 보자. 초대 기독교인들은 쓰레기장에 숨어 있다가 버려지는 아기들을 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설교자나 성도, 어른이나 아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허울 없이 서로의 생각을 논의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를 실천하였다. 큰 영향력을 바라지도 않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보이신 생명의 길을 실천하며, 더 낮은 곳으로 향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걸어간 그분들을 기억하며 스스로 자신의 비전이 지금 어디를,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점검해봤으면 좋겠다. 세상의 비전을 따라가기보다 하나님의 비전에 공명하는 ‘세상이 감당 못하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올바른 비전을 찾길 바란다.

 

2017-11-07T01:03:54+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