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길 위에 자유인

글_채민정

 

 

 

‘왜?’
라는 질문에 답이 턱 막힐 때가 있다. 질문이 곧 대답인 까닭이다.
나는 널 왜 좋아하는가? 너를 좋아하니까.

사실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건 아닐 거야. 평소에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그런 걸까. 누가 물어보지 않아서, 대답할 필요가 없어서. 그래서 뭐라 말해야할지 고민해보지 않아서 그럴지도. 취업을 하기 위해서 썼었던 자소서의 지원 동기 같은 걸 돌이켜보면, 있는 말 없는 말 진심인 듯 아닌 듯 얼마나 애절했던가.

여행을 왜 가고 싶은 거야?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나는 구구절절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주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해본다. 여행이 좋으니까. 떠나고 싶으니까. 쉬고 싶으니까.

 

 

 

일상을 벗어나, 아니 일상을 탈출하기까지. 반년 전 비행기표를 몰래 예약해놓고, 한 달 전부터 쭈뼛쭈뼛 혼자 눈치를 보다가 “부장님~ 저 휴가 좀…”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가. 여권을 확인하고 짐을 챙기고 여행루트를 짜고 숙소를 예약하고 공항버스를 알아보고 환전을 하고. 그 시기에 맞춰 잔업을 남기지 않으려고 퇴근 순간까지 업무에 박차를 가한다. 여행을 결심하고부터 더 바빠지는 이 아이러니라니.

이 아이러니함은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이어진다. 낯선 곳에서의 적응을 하느라 허둥대는 것도 있겠지만, 이것이 과연 쉬고 싶다고 한 사람의 여행 스케쥴인지. 여행 가이드북이 제시하는 대로 하루종일 어디론가 돌아다니고 있다. 재미는 있었는데 뭔가 피곤하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면서야 하는 말. 아이구야 이제 좀 쉬겠네. 잉? 나 쉬러 온 거 아니었나?

우리는 입버릇처럼 쉬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왜 쉬고 있으면서도, 쉬고 싶다고 할까. 몇 년이 지났음에도 아주 강렬하게 기억되는 모 카드회사의 CF광고 카피가 있다.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이 광고가 왜 우리의 심금을 울렸는가. 지금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용한 여행, 바로 ‘쉼’이다.

 

 

 

정말인지 쉬어야겠다. 과감하게 일정을 취소한다. 여행에 와서 꼭 해야 하는 리스트도 없다. 무언가를 하겠다는 생각을 버린다. 시끌시끌 관광객으로 가득 찬 여기 말고,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커피 한잔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버스 타고 가까운 곳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역시나. 이 곳을 거쳐간 여행의 선배들은 블로그에 포스팅까지 남겨 놓았다. 포스팅의 제목마저 탁월했다. ‘커피 한잔 마시러 가기 좋은 마을’

 

버스로 20분. 서울에서 출퇴근도 아침저녁으로 편도 1시간인데, 이 정도면 정말 가깝지. 덜컹덜컹 버스는 조금 불편했다. 창문 밖은 절벽이었고, 절벽 아래로 긴 해안선이 이어졌다. 이런 절벽길에 중간중간 사람이 타고 내린다는 게 이상했지만, 손님은 잠시 늘었다가 다시 줄기도 했다.

아슬아슬한 산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아주 한적하고 평온한 시골 마을. 관광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작은 항구는 반짝반짝 파아란 유리알로 가득찬 보석함 같았다. 모네가 여기서 그림을 그렸다면.. 아니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아직 아무것도 안했는데, 마음이 놀랍도록 황홀해졌다. 이 날을 기다린 듯 날씨는 완벽했다. 한 켠에선 4중주 거리앙상블이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하고 있었다.

온 동네 빨간 지붕으로 덮은 자그마한 마을. 이 동네 동양인은 나 하나뿐이어도 무섭지 않은 곳. 그림 같은 골목길. 길을 헤매도 제 갈길로 가게 되는 그런 곳. 자박자박 걷다보면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오렌지 꽃향기가 향긋하다. 초록빛 나뭇잎 사이로 조각조각 부서지는 따사로운 햇살. 살랑살랑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딱 알맞은 지중해 바람. 아 기분 좋아. 이런 날씨에 이런 기분이라면 어쩐지 자외선도 비타민D일 것만 같았다. 적당히 멋을 부린 듯 안 부린 듯, 선글라스를 써줘야지. 공원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가 있다면, 아주아주 상큼한 레몬맛 젤라또를 먹을 거야.

내가 누군 줄 아는지 호박색 길고양이가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어디든지 가게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잔디밭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시나몬이 찐한 카푸치노 한잔. 거품이 몽글몽글 기분까지 따뜻해지는 맛이었다.

아.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 집을 지으면 어떨까. 초록빛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은 잔디밭과 테라스가 딸린 작은 2층집. 따뜻한 커피 한잔을 내려 테라스 의자에 웅크리고 앉으면, 홀짝홀짝 나 혼자서도 즐거운 티타임. 좋아하는 책을 뒤적이다 낄낄거리기도 하고, 그대로 슬쩍 한숨 잘 수도 있겠다. 이렇게 행복한 상상도 해보면서.

오후가 나른한 고양이마냥 그렇게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손을 잡고 천천히 거리를 걷는 노부부를 바라보면서 왠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말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쉬는 것도 괜찮아. 그게 여행을 떠나온 진짜 이유였으니까.

2017-11-07T01:03:07+00:00